마이조씨의 말은 일상 속에 파고 들어오는 날카롭고 선정적인 흉기 같다고 생각한다. '말'이란 불완전하고 불분명한 도구이며, 우리의 생활 및 의식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또한 개개인의 언어 감각에는 어긋남이 있다. 이 '개인'에 결부된 언어를 일단 일상으로부터 떼어낸 후, 엄밀히 재구축하여 다시 한번 '일상'이라는 풍경 속에 던져 넣는다. 그러면 말은 새로운 열기를 띄며 '개인' 속에 파고 들고, 우리가 말하기를 포기하고 매장시키려 했던 감정과 기묘한 어긋남, 어둠을 파헤쳐 나간다. 문학이란 많게든 적게든 이러한 일을 반복하는 것이지만, 마이조씨 만큼 말의 가능성과 한계를 느끼게 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너토피아 キミトピア'라고 이름붙여진 이 단편집은, 누구라도 한 번쯤은 휘말린 적이 있을 법한, 인간관계의 불화와 어긋남을 극명하게 그려낸다. 등장인물, 특히 화자는, 뭐가 됐든 논리적인 말을 구사해 생각을 하며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려 한다. 예를 들면 맨 앞의 '상냥해날린 やさしナリン'. 남편과 시누이의 '남의 가엾음에 약하다'는 성격이 불러일으키는 금전과 열등감이 뒤섞인 친인척 간의 옥신각신.. 하여간 남에게 설명하기도 귀찮은 이런 실랑이는, 누구라도 한두 번은 휘말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정신력이 무척 소모된다. 아무리 말을 하고 또 해도 왜인지 기막히게 핵심에서 빗겨가는 그 가려움 내지는 불쾌감이, 이토록 훌륭히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주인공 쿠시코-櫛子-는, 남편에게, 시누이에게, 온갖 다양한 말을 구사해 그들의 '상냥해날린'이 부당함을 이해시키려 한다. 이 쿠시코의 말들은 그야말로 "그래! 그 말이 하고 싶었어!". 내 과거의 실랑이 때 쓰고 싶었던 대사가 가득할 정도로 명석하고 종횡무진하다. '한밤의 떠도는 벌 真夜中のブラブラ蜂'의 화자 아미코-網子-의 말들 또한 읽으면서 황홀해질 지경이다. (웃음)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돼"라고 말하면서 절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남편과 아들의 무의식의 영해 속으로 거침없이 파고 들어가는 아미코의 말들에 푹 빠졌다.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갔구만. 폭소)

 

하지만... 하지만, 쿠시코도 아미코도, 말을 나누면 나눌 수록, 상대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만다. 말들이 훌륭한 이론과 세계관을 구축하면 할 수록, 말이 밝히는 빛은, 동시에 서로 간의 거리와 가로놓인 어둠을 진하게 드러내게 된다. ...말의 가능성과 한계란,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려 함의 가능성과 한계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너와 나-キミと僕-, 당신과 나-あなたと私-라는 구별 하에서 서로를 이해하려 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를 바라는 것과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그 말의 한계를, 사람과 사람 간의 멀고 먼 거리를, 마이조씨는 온갖 다양한 시도와 장치를 구사해 돌파하려 한다. 물 흐르듯, 짜증스러운 '지금'을 으적으적 씹으며 달리는 그 모습, 그 춤사위가 나는 참 믿음직하고, 섹시해서 좋기도 하고, 갈 데까지 가줬으면 싶기도 하다. 문체의 질주감을 읽는 재미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왜 마이조씨는 아쿠타가와상을 받지 못 하는 걸까. 참 이상하다.

 

キミトピア 舞城王太郎 新潮社

(おいしい本箱 book cafe 2013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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