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기도다. 나는 기도한다."

 처음으로 혼자 차별 반대 시위행진에 참가했던 열여덟 살 때, 나는 플래카드에 그렇게 적어서 들고 갔다. 마이조 오타로  불후의 명작 "좋아 좋아 너무 좋아 정말 사랑해. 好き好き大好き超愛してる"의 한 구절이다. 요동치듯이 튀기는 괴물같은 비트를 깔고, 아름답게 비약되는 현상들과 생생한 대화극이 어우러져 번뜩번뜩 빛난다. 이야기라는 구조 그 자체와 정면으로 맞붙는 메타적인 전개가 레일을 벗어나며 질주한다. 마이조 작품의 매력은 셀 수 없이 많지만, '마이조 오타로에게서 무엇을 배웠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은 기도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두려운 이리야 그녀의 석류 畏れ入谷の彼女の柘榴"는 마이조 오타로 데뷔 20주년(*역주:2021년)에 간행된 단편집이다. 생명을 '잉태시키는' 손가락을 갖게 된 아이에 의해 가족이 흔들리는 표제작, 사람 말을 하는 수수께끼의 원숭이와 사람을 농락하는 게가 있는 마을에서 주인공이 사랑을 고민하는 '뒷산의 굉장한 원숭이 裏山の凄い猿', 그리고 사람 모습을 한 누군가의 미련―'오노코리상 お残りさん'이라고 불리운다―이 찾아오는 집에 태어난 세 남매의 이야기 '우리 집 현관에 앉는 한숨 うちの玄関に座るため息'을 수록했다. 모두 얼핏 보기엔 황당한 설정이고, 띠지에 쓰인 '이담異譚'이라는 칭호가 어울린다. 하지만 세 이야기는, 모두 '올바름'을 넘어선 곳에 있는 '상냥함'을 문제 삼고 있는 점에서 일관적이다.

 

   '두려운 이리야 그녀의 석류'에서는, 주인공 신이치伸一가 아내 치즈루千鶴의 불성실함과 대치한다. 네 살배기 아들 나오토尚登의 '잉태시키는' 손가락을 이용해 여기저기 분별 없이 '축하할 일'을 일으키고 있던 치즈루는, 신이치가 아무리 생명의 무게를 설명해도 실없이 대꾸하며 결코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책임을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이 있다는 현실 자체는 어쩔 수 없다. 사실 바꿀 방도가 없다. 그럼에도 신이치는 치즈루를 가벼이 여기지 않기에 진심으로 비판한 후, 치즈루의 새로운 인생이 더 나아지길 기도한다. 이는 정의로운 신이치가 치즈루를 심판하는 구도가 아니며, 그저 입장이 다른 사람과 사람이 각자 살아가기 위한 시행착오였다. '상냥함'이란 충돌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존재와 진심으로 마주하는 길을 선택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상냥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신이치는 외치고, 기도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무력함에 몸부림칠 때의 외침과 기도는, 결코 나약한 것이 아니다.

 

   '뒷산의 굉장한 원숭이'의 화자인 '나'는, 주위의 지적을 받고 자신은 사랑을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일지도 모르겠다고 고민하기 시작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못된 짓을 하는 '게'가 벌인 유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인다. '산과 강과 바다에서는, 이상한 것을 가지고 돌아가지 않을 것'―사람 말을 하며 마을 사람들을 돕는 '뒷산의 굉장한 원숭이' 카도타 치즈角田チーズ는 전화로 '나'에게 '인간의 규칙'을 전해주지만, '나'는 규칙을 깨고 눈앞의 존재를 '가지고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중요한 것은 '올바름'을 어떻게 뛰어넘느냐다. 나는 '올바름'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식의 말들을 경계하는데, 그것은 '올바름'에 대한 의심이 부당함을 성토하는 것에 대한 냉소적 혐오와 연결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는 '올바름'의 의미도 이해 못 했을 뿐더러, 행동도 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상냥하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 필요하다. 올바른 것을 올바르다고 이해하는 말과, 타인을 위해 힘을 쏟는 행동, 그 양쪽 모두가. 그래서 화자 '나'는 스스로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뒷산의 굉장한 원숭이'는 역시 '굉장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결국 사랑을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어디선가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한 기도만은 포기하지 않으며 끝난다. 이 전개는 근거 없이, 그러나 하염없이 희망적이다.

 

   '우리 집 현관에 앉는 한숨'은, '남은 분-오노코리상 お残りさん'의 집에 태어난 세 남매 중 막내 토모히데智英의 시점으로, 맏형 카즈마和真와 그의 연인 나오야直哉―<여성으로 밖에 안 보이는> <남성>이다―에게 찾아오는 관계성의 위기를 그린다.

 

 이 집에서 '오노코리상'이 사라질 때까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여성 뿐이고, 남성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난, 나를, 후회를 받아들일 생각으로 선택해 줬으면 했어"라고 고하며 카즈마의 곁을 떠나려 하는 나오야와, "후회하지 않기 위해" 나오야를 선택했다 말하고는 나오야를 붙들려 하지 않는 카즈마와의 단절로도 이어진다. 자신 안의 '올바름'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이를 마주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말이다! "<올바른데 틀렸다>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는 있다."라고 하는 토모히데의 독백대로, 역시 여기서도 '올바름'을 뛰어넘을 것이 요구된다.

 

 다만 이 작품의 나오야에 관련된 묘사는 위화감도 있었다. 퀴어이며 젠더에 관한 문제의식을 항상 품고 있는 나오야의 고민에 대해, "그런 고민은 애시당초 필요 없어"라고 하며, 경의를 표하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을 내뱉는 토모히데의 행실에는 문제가 있다. 오히려 경의야말로 눈앞에 있는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 아닌가. 또한 작품 속에 '성자인性自認'(*gender identity의 번역어 중 하나)이라는 표현도 등장하는데, 이는 젠더 아이덴티티를 자유의지로 선택 가능한 것으로 오해시킬 우려가 있기에 피해야 할 표기라고 생각한다.

 

 말과 행동, 어느 쪽도 필요하며, 특히 눈앞의 상대를 위해 힘을 쏟는 행동이야말로 꼭 필요하다―마이조 오타로는 파격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이 말을 몇 번이고 거듭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모든 희망이 무너질 때 떠오르는 최후의 선택지가 바로 '기도'다.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기를."

 

 표제작이 끝날 때, 많은 기도의 마지막에 외침이 삽입되는 것은, 기도하는 마음이 차마 말이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넘쳐흐른 기도는, 문체로부터도 벗어나 세계로 퍼져나간다. 바보같은 상상인 줄 알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형태로 기도할 수 밖에 없을 만큼 누군가와 마주한다면, 진짜로 이 세상은 변하지 않을까. 아니 변했으면 한다.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지기를.

 당신이 되도록 살아있어 주기를.

 기도할 수 밖에 없을 때 기도를 받아주는 이 책이, 나는 아무래도 사랑스럽다.

 

横溢する祈り (あああああ!) 高島 鈴

(群像 202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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